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칭기즈 칸 (문단 편집) == 여담 == *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전염병]]이나 화살에 맞은 상처가 악화되어 죽었다거나 [[벼락]] 맞아 죽었다거나 말에 떨어져 죽었다거나 심지어 [[복상사]]했다고 전해질 정도로 여러 설들이 많은 편이다. 칭기즈 칸에게 원한을 품은 여인이 자신의 [[음문|중요 부위]]에 날카로운 비수를 넣어두고, [[성관계]]를 할 때 칭기즈 칸의 성기가 잘려 죽었다는 야사도 전해진다. 그러나 일단은 《[[원조비사]]》에서 기록된 대로 말에서 떨어진 후 그 부상과 합병증으로 죽었다는 설이 정설로 취급된다. * 여러 의미로 볼 때 사실상 [[몽골]]의 시조다. 칭기즈 칸의 통일 이후 《대(大) 야삭》(ᠶᠡᠬᠡ ᠵᠠᠰᠠᠭ / Их Засаг)이라는 사실상의 법률과 문자가 만들어졌다. 현재 [[영어]]로는 'Yasa'나 'Yasaq' 등으로 칭해지지만, 현대 [[몽골어]] 발음은 '이흐 자슥'에 가깝다. 고전 몽골어 표기는 'Yehe Zasag'(예헤 자삭). 또 부족 국가 수준이던 몽골인들의 동질감이나 정체성도 이전보다 뚜렷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에도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 제1의 공항인 [[칭기즈 칸 국제공항]] 등에 그 이름을 기리고 있다. * 칭기즈 칸의 친위대인 [[케식]](한자로는 겁설, 怯薛)은 몽골 기병의 스테레오 타입으로 유명하며, 몽골을 주제로 한 게임이나 매체에서는 심심치 않게 들어간다. 이 친위대는 원래 1203년 칭기즈 칸이 다른 부족의 자객을 막으려고 창설한 부대인데 원래 100명에서 시작했던 게 전성기까지 10,000명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 자식들은 서로 사이가 안 좋은 편이었는데 다른 것보다 [[주치(몽골 제국)|주치]]가 문제였다. 반대로 호라즘 왕조의 잘랄 웃 딘의 경우 할머니에게 암살당할 뻔한 것을 정작 '''그가 제거된 후 후계자로 옹립될 예정'''이었던 동생이 이를 '''거부'''하고 형에게 달려가 알린 덕분에 목숨을 건졌을 정도로 형제 간 사이가 좋았다. 잘랄 웃 딘의 활약을 칭기즈 칸이 보고 "저런 아들을 둔 아버지는 행복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는 전승이 있는데, 형제간의 우애를 알았다면 더더욱 부러워했을지도? 주치의 진짜 아버지가 누구냐는 문제로 2남인 [[차가타이]]와 갈등이 있었고 이런 와중에 오고타이가 칸이 되었다. * 아시아의 약 8%(전 세계의 0.5%)의 남성 인구는 같은 Y염색체를 가지고 있다([[http://news.nationalgeographic.com/news/2003/02/0214_030214_genghis.html|#]])는 것이 확인되었는데, 이 염색체의 기원이 딱 징기스칸이 활동하던 시절인 11~13세기 정도로 수렴되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이 염색체의 공통조상을 칭기즈 칸으로 지목한다. 이에 대한 반박하는 학설도 있으나([[https://youtu.be/qrPnMEpOuNw|#]]) 이 반박자료도 문제가 있는데, 혈통 논란으로 당대에도 말이 많았던 맏아들 [[주치]]의 후손들이 다른 후손들과 Y염색체가 다르다는 조사결과를 뭉개버렸다는 점이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초반부에 주인공의 집을 밀어버리는 철거업자가 칭기즈칸의 후손이다. 그래서 항의하는 주인공을 무시하고 1분 1초라도 빨리 주인공의 집을 철거하고 싶어했다. 본인도 칭기즈칸의 후손인걸 모르고 있는 평범한 영국인으로, 평소엔 선량한 사람이지만 현관에 도끼를 장식하고 싶어한다든지, 가끔씩 피와 연기와 말울음 소리의 환상에 시달린다든지, 털모자에 대한 깊은 애착을 보인다던지 하는 증상을 보인다고. * 하지만 한국과 일본 등지에는 없다는데 있을 리가 없는 게 칭기즈 칸 생전에는 고려에 대한 침공은 없었다. 1218년 거란의 잔당 소탕을 명분으로 고려에 진입한 것이 고려와 동맹을 맺기 위해서 의도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고려사》 <조충전>에 칭기즈 칸의 명령으로 형제 맹약을 맺는다고 적혀있기 때문. ([[http://db.history.go.kr/id/kr_103r_0010_0010|#1]],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671586&cid=62131&categoryId=62163|#2]]) 수부타이만 고려 근처에 가서 종이를 받아왔을 뿐이며 당연히 일본은 구경도 못했다. 고려와 몽골의 전쟁은 오고타이 칸 때 발발하였으며, 이후 [[충렬왕]]/[[충선왕]]/[[충숙왕]] 대의 결혼도 왕비가 황금씨족인 덧이라 부계 피를 물러 줄 수 없으니 칭키즈칸이 물려줄 Y유전자는 없다. 결정적으로는 [[왕씨 몰살]]까지... 후손이 없다라고 단정 짓는 건 불가능하지만 역사적으로도 없는 쪽이 더 부합한다. * [[보르지긴]] 부족, 가문 중에서도 칭기즈 칸의 직계 혈통은 [[황금씨족]]으로 따로 분류했다. * 칭기즈 칸의 [[무덤]]은 어디에 있는지 [[미스터리]]인데 [[보르항 산]] 등 여러 후보지가 있지만 전부 확실하지 않다. 여기에 대해선 좀 으시시한 [[전설]]이 하나 있는데, 칭기즈 칸의 무덤을 옮기는 과정에서 '''마주친 살아있는 모든 것을 몰살'''시켰다는 것이 그것. 칭기즈 칸의 무덤은 묻은 후 파헤쳐지는 것을 막기 위해 기병대가 수없이 짓밟음으로써, 무덤을 평지로 만들어 아무도 찾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돌아온 기수들도 미리 준비해둔 자들에 의해 몰살되었다고 전해진다. 다만 전설일 뿐 사실인지는 밝혀지지 않아 학계에서도 실체성 논란이 있다. 부정하는 쪽은 학살자 칭기즈 칸을 미워한 자들이 만든 근거없는 낭설로 보는 편이다. 화려한 무덤이 아닌 유해를 그의 충복이 소박하게 평범한 몽골식 장례로 치렀다는 말도 있다. 이후 세월이 지나면서 소박했던 무덤이 자연스레 사라지거나 잊혀졌다는 주장이다. 칭기스 칸이 생전에 사치를 싫어하고 유목민의 전통을 지킨 것을 상기하면 이쪽도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 당시 몽골식 장례는 시신을 말에 실은 후 달려나가서, 말이 지쳐서 멈춰선 곳을 파 돌로 시신 주변을 두르고 묻는 것이었다고 한다. 천하를 제패한 대칸의 장례로는 너무 소박한 것 같지만 몽골인이었던 칭기즈 칸의 장례로 어떤 의미로는 가장 적절하다고도 볼 수 있다. 아예 칭기즈 칸이 화장이나 풍장 등을 해서 무덤 자체가 없었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이것도 사서마다 명칭은 다르지만 분명 어떤 곳에 묻긴 묻었다는 기록이 제법 남아있어 참 이도저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다.[* 여담으로 칭기즈 칸 뿐만 아니라 이후 많은 칸들의 무덤도 칭기즈 칸과 비슷하게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일본이 [[중일전쟁]] 시기 무덤을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일본이 칭기즈 칸의 무덤을 그렇게 찾으려고 했던 이유는, 칭기즈 칸이 일본인([[미나모토노 요시츠네]])이었다는 일본 내 [[사이비 역사]] 속설을 증명(?)하여, 당시 중국 및 몽골 침략을 억지로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 그 밖에도 [[북경원인]] 유골까지도 일본은 당시 손에 넣으려고 했는데, 북경 원인이 일본인의 조상이니 당연히 중국은 일본이 차지해야 한다는 또 다른 억지주장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대신 [[몽골]]의 고고학 기술이 발전했다고 한다. 2차대전 이후에도 여러 고고학자들과 트레저헌터가 명예와 부를 위해 힘을 합쳐 칭기즈칸 관련 고서 등을 보고 후보지들을 추려내, 후원금으로 산 최첨단 장비로 조사했으나 누군가 다치거나 발굴 작업 노동자가 죽는 등 을씨년스러운 일이 제법 벌어지는 바람에 결국 포기하고 철수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칭기즈 칸을 거의 신앙처럼 받드는 상당수 몽골 사람들은 이런저런 외부 간섭이 불편하기도 해서인지 칭기즈 칸의 무덤을 찾는 것 자체를 불길하다고 여겨 꺼리는 분위기도 있는 모양. 더 나아가 이들이 발굴단을 조직적으로 방해했다는 설도 있다. 결국 한 몽골 대통령이 무덤 발굴 및 탐사 금지를 주장하면서 법제화한 이후, 칭기즈 칸 묘를 찾으려는 고고학자나 트레져헌터들의 활동은 대거 불가 딱지를 먹게 되면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냉전이 끝난 1990년대 이후 많은 탐사대들이 몽골 일대를 탐사했다. 특히 유명했던게 모리 크라비츠라는 미국 학자였는데, 2000년대 초반엔 그럴듯한 장소가 발견되어 탐사 작업까지 들어갔지만 결국 전염병 등 이런저런 이유로 탐사를 중지한 바 있다. * 카네기연구소와 [[막스 플랑크 협회]]에 따르면 칭기즈 칸은 본의 아니게 '''지구 환경을 급격히 개선'''시키는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칭기즈 칸이 주도한 [[몽골 제국]]의 정복 전쟁 당시 '''[[아시아]]-[[유럽]] 구대륙 세계 인구의 1/20을 [[학살]]'''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당시에 급증하던 [[이산화 탄소]] 배출량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그 양이 '''약 7억 [[톤]]'''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2009년]] 세계에서 배출된 온실가스의 총량과 맞먹는다. 인구수를 단기간에 극단적으로 많이 줄인 덕분에 '''[[지구 온난화]]는 무려 200년이나 더 미뤄졌다는 주장이다.''' 이 시기에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이토록 어마어마했던 이유는 상당부분 [[송나라]]에 기인하는데, 송나라 경제가 번영하고 석탄 산업도 활발히 전개되면서 인구도 1억에 가깝게 늘어나고 이산화탄소 배출량 역시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특히 [[남송]]의 경우에는 석탄을 대량으로 채굴해 작업용, 난방용으로 때기도 했다. 물론 [[코크스]]나 [[증기기관]]을 쓴 건 아니라서 효율은 낮았고, 송나라가 여러 기술 발전을 이뤄냈지만 이후의 영국처럼 [[산업혁명]]의 기반을 닦던 수준까지 도달하지 못해서, 부유한 중세 농경국가 수준이었다. 그래서 중국은 물론 한반도 등 근처 지역의 대기 오존에까지 악영향을 줄 수 있었던 것을, 칭기즈칸이 등장하면서 의도치 않게 차단했다는 것.[* 이 사실 덕분에 일부 사람들은 칭기즈 칸을 농담조로 환경운동가(...)라고 부르기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